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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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31 - 이규현 목사 전신지
글쓴 날짜 시간 2023-02-10 16:05:29

제목 : 거라사의 광인 


본문 :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본문의 귀신 내쫓는 이야기는 공관복음에서 가장 긴 스토리 중 하나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귀신들린 사람,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독 많이 나옵니다. 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 병든 사람이 많을까요? 마가는 죄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들을 치유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귀신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이기 때문에 설명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후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것과 정신병은 구분됩니다. 정신병은 질병이고, 귀신들린 것은 그를 통제하는 어떤 악한 영의 존재가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일어나는 기괴하고 음울한 사건들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악의 힘, 악의 실체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선 귀신이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귀신이 들린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2절에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합니다. 귀신은 더러운 존재로, 육체적으로도 더럽고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않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 지저분하고 희한한 악취가 납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귀신을 돼지 떼에 넣어 몰살시키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굉장히 부정한 동물로 취급되었습니다. 귀신과 돼지의 연결은 자연스럽습니다. 더러운 생각과 생활을 계속하면 귀신이 들어오라고 신호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면 이미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귀가 만들어 놓은 문화를 보십시오. 일단 추하고 혐오스럽습니다. 귀신과 성령은 상극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까? 영을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더러운 것에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오염되면 마귀의 영역 안에 나도 모르게 들어가 버립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본문 2-3절을 보면 그가 사는 곳은 무덤 사이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산 자지만 무덤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정상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살지 못하고 사람을 피합니다. 철저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가족마저도 함께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돕고자 하는 사람도 없고 도울 수도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들과 분리시킵니다. 외톨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불행한 삶은 관계가 끊긴 삶입니다. 개인과 가정, 공동체를 깨어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면 사람이 좋아집니다. 공동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귀신들린 자는 무덤 사이에서 거닐며 비사회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귀신들린 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과 발을 쇠사슬로 채웠는데도 그냥 끊어버립니다. 이 강력한 힘은 자기 힘이 아닌 마귀가 주는 힘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힘을 가졌는데도 불행한 것입니다. 선한 힘이 아닌 악하고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면 제어가 안됩니다. 귀신들린 자의 눈빛을 보면 살의가 느껴집니다. 행동이나 말도 매우 거칩니다. 

물론 마귀가 늘 이런 모습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마귀는 어떤 때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고 나타납니다. 마귀는 속이는데 명수입니다. 본문에서는 노골적인 정체를 드러냅니다. 요즘 폭력적인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마귀로부터 온 폭력성은 개인의 불행은 물론이고 가정을 해체하고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유대인을 그토록 잔인하게 대량학살한 역사는 그냥 한 인간이 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역사,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내십니다. 마귀는 파괴하고 폭력적인 역사를 만듭니다. 

본문 5절에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자신의 몸을 해치는 모습을 봅니다. 인간은 존엄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인권과 성경이 말하는 인권은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이 왜 존귀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해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증오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약이 없습니다. 자해는 그 이상입니다. 요즘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너 죽어!” “너 같은 인간은 죽어야 해!”라는 환청을 듣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라며 강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도 귀중히 여깁니다. 

본문 15절에는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귀신들린 자는 수치심이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그는 옷을 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옷의 유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수치를 느끼고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부끄러워해야 정상입니다. 

인류의 문화 안에는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노력이 가득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담해도 낯뜨거운 일을 대놓고는 하지 못합니다. 밤에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도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최대한 연약한 부분을 가리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는 옷을 벗고 돌아다녔습니다. 수치심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과 같냐면 짐승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관음증, 노출증 같은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모두 감각이 망가졌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귀신이 아주 기본적인 감각까지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감각이 망가져서 자신의 고귀함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를 짓고도 수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귀신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 주심으로 부끄러움을 영원히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귀신들린 자의 특징은 밤낮이 없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통제를 잃은 상태입니다. 귀신들렸다는 말은 귀신에 장악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광풍 앞에 꼼짝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자연의 힘에 지배를 받든지, 귀신에게 지배를 받든지 인간은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겼기에 그냥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웃고 싶을 때 웃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웃고 싶어도 웃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상태입니다. 밤에 잠을 자고 싶은데 잘 수 없어 밤에 돌아다닙니다. 가만히 보면 자기가 돌아다니고 싶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잠잠하고 싶어도 입에서는 악담과 저주가 쏟아져 나옵니다. 

불행한 사람 중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지금 자기 통제가 잘 되고 있습니까?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습니까? 인간다운 삶이란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힘에 지배를 받으면 노예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최고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옛날에는 마귀의 종노릇 했던 우리가 모든 것으로 풀려나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묶고 있던 거짓된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자유입니다. 예수께 사로잡히면 다른 힘이 나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통제 기능이 살아나고 모든 것이 정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쇠고랑을 채운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돕고 싶어도 도울 힘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나름 전문가를 동원하고 해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쇠사슬을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육신을 결박한다고 귀신들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될 뿐입니다. 

왜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도와줄 수 없을까요? 마귀의 힘을 능가하는 힘이 아니면 그를 도와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망가지고 깨어진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악한 영에 시달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너무도 비극적인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딱히 도와줄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 일이 어디에서 벌어졌습니까? 거라사인 지방은 갈릴리 바다 북쪽입니다. 본문 20절에 지명이 나오는데 ‘데가볼리’라는 도시입니다. 돼지를 키우는 것만 보아도 이방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이방 땅에서 일어났다는 일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도시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둡고 지저분합니다. 온갖 범죄가 난무한 곳입니다. 도시의 밤은 그 어느 곳보다 어둡고 추악하고 음습합니다. 밤낮을 인식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쩌면 귀신들린 사람도 그 희생자일 수도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귀신과 대화를 하시고 쫓아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귀신의 만남은 불가피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영이 장악하는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8절에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람과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던 분이 귀신을 향하여 동일하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의 이름을 묻지 않고 귀신의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이미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에게 이름까지도 다 빼앗겨 버린 상태입니다. 이름이 없다는 말은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송두리째 다 강탈당한 사람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9절에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소개합니다. 이 군대는 군단을 말합니다. 그 당시 로마의 군대 단위로 이야기하면 6,000명 정도 되는 숫자입니다. 귀신이 하나만 들어도 힘든데, 떼로 들어차 있습니다. 얼마나 복잡하고 정신없는 상태였을까요? 귀신이 6천이나 있다는 말은 정신이 혼미한 것 이상입니다. 거대한 힘으로 한 개인의 인격을 분열시키고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 죄 된 삶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마귀의 진영에 볼모를 잡힌 삶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면 마귀에게 점령되어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광기어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많습니다. 끔찍한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고 사이코패스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마귀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본문 6-7절에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귀신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본문 13절에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은 귀신들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귀신이 들어갈 곳은 돼지 떼 이외에는 적당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어디입니까? 바다를 향해 내리달아 몰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가 드러납니다. 예수의 말 한마디에 사단의 권세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사탄의 왕국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7절에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동네에서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돼지 떼가 대량 몰사함으로 축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더러운 동물로 취급받았지만 이방인에게는 인기 있는 비즈니스였습니다. 예수가 여기에 더 머물러 있다가는 모두 쫄딱 망할 것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토록 비참하게 살았던 한 영혼이 귀신으로부터 풀려나 온전하게 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즈니스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세계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는 것은 물질적 세계관입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보면 한 영혼은 돼지 이천 마리와 비교가 안 됩니다. 성경적 가치에 의하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함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얼마의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다룹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쳐버립니다. 군대 귀신은 돼지 떼들에게로 들어가 몰사했지만 또 따른 귀신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양돈 사업가들의 영혼 안에 돈 귀신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돼지나 돼지를 치는 사람이나 비슷해져 버렸습니다. 

귀신들린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14-15절에 보니까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다는 것은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평범함을 잃고 살았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은 치유된 모습을 의미합니다. 평범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비정상이었습니다. 비정상적인데 비정상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의 영이 임하시면 정상이 됩니다. 자기도 통제할 수 없었던 삶이 철저히 성령에 의해 통제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를 등지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던 사람에게 향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폭력적인 사람이 순한 양처럼 부드러워집니다.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야 정상인이 됩니다. 귀신을 몰아내는 일은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아무리 먹어도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결단하고 서약을 하고 혈서까지 써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죽을 때까지 그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삽니다. 내가 변화하려고 하면 나를 억압하는 힘보다 더 큰 힘이 작용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간단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됩니다. 알콜 중독에 빠진 사람이 일평생 노력해도 안 됩니다. 음란함에 빠져 살던 사람은 스스로 못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 한번 만나주시면 한 방에 끝납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술 담배를 한순간에 끊으셨습니다. 주님이 임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귀신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찾아오시면 귀신은 물러나고 우리 안에 광풍도 잠잠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9-20절에 “19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정신이 돌아오면서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치유와 회복의 완성은 가정입니다. 어쩌면 귀신들린 사람의 깨어진 삶은 가정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세계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라”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은 가장 친밀한 관계가 있고 사랑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간증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이 많이 망가져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모두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쇠사슬을 끊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할수록 마귀의 활동은 위축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그리스도를 모시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여러분들의 가정, 개인, 모든 삶 속에 충만하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또한 먼저 자유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웃들을 어두운 곳에서 끌어내어 자유케 하는데 쓰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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