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뜻과 안식일ㅣ기 도(11)

운영감자
2024-04-05 16:05:15

기도의 뜻과 안식일 \ 제 11 강

 


- 계 3:14-22 -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예수님께서 친히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각 교회, 각 신자들의 신앙행위에 대해서 칭찬과 꾸지람을 하시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편지는 오늘날 현대교회가 가장 크게 실수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깊이 음미해야 할 내용들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와 신앙인들의 가장 큰 신앙의 잘못일 것이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 곧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형국이다. 신앙이 우리가 결심을 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뜨거워지고, 아름다와지고,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가 끊임없이 가야 하는 길이다. 신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자신의 신앙에 만족하는 태도이다. 16절은 이렇게 꼬집는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경고이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지적은 음미할만 하다. 17절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할 정도였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건강하고, 먹고 사는 일에 부족함이 없고, 자식이 속 썩이지 않으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지적한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몇가지만 지적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보통 자랑하는 그 건강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건강해서 고작 한 일이 무엇인가? 밤새워 고스톱 밖에 더 쳤는가? 건강해서 선교하는 사람이 없다. 아파서 성경보는 사람은 보았어도 건강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언제 건강이 우리에게 영적인 것과 인생의 깊은 것을 생각하게 한 적이 있는가? 없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과 찾아간 사람을 비교해 볼 때 누워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영적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 영적인 부자라고 생각하는 만큼 큰 오해는 없다. 이 세상의 제일 큰 병은 돈이다. 우리에게 돈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진정한 친구를 얻지 못한다. 그것을 빼앗아 먹으려는 사람만 생기지 진정으로 도와주려는 사람은 모이지 않는다. 돈을 갖는 것이 언제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가? 말은 그렇게 한다.


“돈이라도 가졌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위하는 것일 뿐이다. 경제적인 부유는 우리에게 어느 것 하나 해결해 주는 것이 없다. 뜻밖에도 자녀들을 돈으로 키우면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어렵게 큰 가정은 형제간에 우애도 좋고 부모 자식간의 존경과 사랑이 있지만 여유가 있어 돈으로 키운 집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늘 배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돈만큼 인간을 금방 망하게 하고, 금방 저주 속에 파묻히게 하는 독약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려 그것이 우리의 곤고한 것이며, 가련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라” 우리는 불로 연단한 정금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좋은 예를 남기고 있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6-19)”


요셉의 생애를 보면 아주 신비하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사람보다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실수한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는 누구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고난과 어려움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는 17세에 종으로 팔려 13년 동안을 객지생활, 노예생활, 옥중생활을 했다.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여 있는 형벌을 당한 날을 보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극적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성경은 이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과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간섭하셨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그를 단련해 냈다는 뜻이다. 시험을 보는 것과 훈련을 시키는 것은 다르다. 시험은 시험을 보게 해서 어느 성적 이하이면 낙제를 시키고, 어느 이상은 합격을 시킨다. 그러나 훈련은 목표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오늘 해서 안되면 내일하고, 내일해서 안되면 모레 또 해서 목표로 정한 수준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런데 요셉의 길은 어렵고 험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1-3)”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19-23)”


이런 형통의 복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이끄신다. 당신은 그런데 왜 교회는 출석하는가? 죽은 뒤에 지옥 가기 싫으니까 믿어두자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루어야할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신앙’이다. 우리는 분명히 천국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훈련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언제나 문제이다.


본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면, 불로 연단한 정금을 살 것을 요구한 후에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 구절은 불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3:22)” 신자들을 향하여 하고 있는 말씀이다. 신자는 이제부터 훈련해야 되고 불로 연단하여 정금같이 되어야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본받는 것이다.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 한다. 주님께서 요구한 것같이 자기를 복종케 하며,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져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나로 말미암아 옆에 있는 신자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이 이익을 얻도록 섬기는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과 교회 경력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으로 쓰이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싸움이다. 이것만큼 어려운 싸움은 없다. 신앙이란 결국 신자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뒤를 좇아가는 졸병이 되는 것이다. 지금 지적은 이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부요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는 가난한 사람’이다. 나의 부요함이 옆사람을 깔고 뭉개서 우위를 확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부요인가?


신자의 삶의 모습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길을 좇아오고 싶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부요이다. 나의 삶을 보고 저 사람이 걸은 것으로 인하여 저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있으며, 행복이 있으며, 기쁨이 있으며, 보람과 진리가 있어서 ‘나도 그 길에 붙여 주십시오’하고 말해 올 때 그것이 부요이다. 그 부요가 나에게 있는가? 없다면 우리는 분명 성경이 지적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다.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남이 죽어야 된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내 것을 채울 수 있다면 이것은 가난이다. 거지이다. 나의 신앙이 얼마나 부요한가, 얼마나 가난한가 하는 것은 지금 바로 이와 같은 기준에서 살펴보면 확실해진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이것이 아브라함과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복을 얻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그토록 부요하게 부름을 받고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축복이 너무 커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 부스러기를 먹어야 한다. 한 교회의 신앙의 성숙도는 그런 부요한 자가 얼마나 많으냐의 싸움일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좋은 전통이어야 하고 분위기여야 한다.


요셉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는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가고, 그 발이 착고에 상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이는 고통을 13년간 당한다. 그러나 요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때에 전 인류가 구원을 얻는다. 그가 7년의 흉년을 대비해서 애굽을 살릴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 민족들을 살리고 자기 가족을 살려낸다. 그것이 부요이다. 이 칠년 풍년으로 칠년 흉년을 대비하게 하는 것, 그것이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는 것이다. 지금 칠년 풍년이 전부가 아닌 것을 보게 함으로 칠년 흉년을 대비케 하는 것이 지혜롭고 참다운 자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금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훈련과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풍년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들이 영적인 차원을 벗어나서 노력해서 먹을 것과 쓸 것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부요할 수 있는가? 곧 칠년 흉년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면 이 세상의 것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우리 앞에 닥칠 것이다. 그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가? 요셉의 형들이었지만 그들도 그것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요셉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곡식을 구걸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복의 근원이다.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초대될 수 있는 그런 특권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나는 가난한 자요, 곤고한 자이다. 우리가 “나는 부요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실상은 우리의 힘도 아니고, 우리의 재산도 아니며 믿을만한 것도 아니다. 시편 23편은 부족과 부요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밤낮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는 심정에 들어가면 그것을 외우다가 조금만 괜찮아지면 언제 읽었느냐는 듯이 딴 것 구하지 말고 여유있고 시간있을 때 제대로 신앙훈련을 해야 한다.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불로 연단하라. 읽고 듣은 성경들이 헛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 것을 목도하라. 나에게 허락된 감사와 찬송과 기적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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