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뜻과 안식일ㅣ기 도(2)

운영감자
2024-03-14 17:04:19

기도의 뜻과 안식일 제 2 강

 
- 눅 18:1-8 -

 


과부와 재판장 비유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기도에 있어 가장 많이 오해되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태도이다. 오늘 누가복음 18장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기도가 ‘매어 달리기 시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과부, 고아는 가장 약한 자라는 표현이다. 과부는 남편이 없고, 자식을 낳을 수도 없다. 그래서 남자가 발언권을 가지고 힘을 누리던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배필이나 자식이 없는 과부는 가장 나약한 자의 표현이다. 여기 어떤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재판관에게 그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는데 재판관이 들어주지 않는다. 끈질기게 매어 달리자 결국은 귀찮아서 들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열심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귀찮을 정도로 매어 달리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 1절을 보면 이 비유는 ‘열심’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된다는 문제에 관한 비유라고 말한다. 기도를 들어주는 이유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들어주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등장하고 있는 본문이다. 누가복음 18장 1-8절의 과부 사건은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느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응답을 받아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문제에 대하여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준 예화이다. ‘어느만큼 기도하면 응답을 받느냐’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만큼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을 수 있는가’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꺼내놓은 것이 누가복음 18장 과부 사건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낙망치 말 것에 대한 비유이다. 기도는 항상 하되 그러나 낙망치 말라고 하신다. 항상 기도하면서도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제시하는 이유는 늘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이 우리의 욕심껏 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판관이란 우리나라의 판사가 아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재판관이란 사사를 말한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과부가 와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데 갚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번거롭게 함으로 후에는 들어 주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 18:5)”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오늘 본문은 전부가 앞의 사건과의 대칭이다. 앞에는 불의한 재판관이고 뒤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다. 앞의 대상은 과부이고 뒤에는 사랑하는 자녀이다. 여기서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억울한 과부와 사랑하는 자녀가 재판관과 하나님께 와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는 점이다. 만일 이 공통된 부분이 없다면 이 두 비유는 대칭을 이룰 수 없다. 이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관은 그 일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이고,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는 우리가 우리의 요구를 아뢸 수 있는 그런 아버지시다. 이것만은 공통되는 점이다.


본문에서는 분명히 이 비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이 번거로움을 느꼈다면 찾아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과부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관이 이 과부를 찾아오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는 빌미는 찾아오는 횟수가 아니라 물고 늘어지는 정당함에 있다는 이야기다. 과부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찾아와도 번거로울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녀들의 부르짖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한이 문제이다. 11절을 보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 느냐(눅 18:11)”


여기서 원한은 정당한 요구에 대한 원한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정당한 요구일 때는 일말의 양심에 걸리는 법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의 정당한 요구인 경우에는 어떠하겠느냐, 이것이 일차적인 대조이다. 불의한 재판관에 대해서 정당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대상이 전자는 과부이고, 후자는 택하신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그런데 재판관 쪽에서도 그 꼬투리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면 후자에서는 들어주는 것이 더욱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대조를 놓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많이 쓰는 방법 중의 하나가 떼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근거없이 떼를 쓰는 것은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요구가 정당할 때 떼를 쓰면 정당하기 때문에 귀찮아서 들어주는 일이 있다. 이와같은 우리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여기서 대조해 보고 증폭된 비유를 이제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불의한 재판관과 공의로우신 하나님, 또한 돌보아 줄 필요없는 외면해 버려도 되는 가장 나약한 사람의 권리와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의 요구, 이런 증폭된 비유와 대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준에서 기억해야 될 점이 있다. 그런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결론이 나는 것이다. 사실은 누가복음 18장은 이 이야기를 쓰고 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나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니 절대 절망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기도에 있어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은 시작하는 순간에 이미 다 알고 계시고, 우리가 우리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만큼 하나님은 내 기도에 간절히 응답하고 계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은 ‘네가 필요로 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안타까와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너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안 들어 주시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안 들어 주시는지에 대하여는 말씀이 없다. 각자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느 것이라도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가지시는 기본적인 태도와 기본적인 안타까움이 무효화되거나 약화되거나 외면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낙망치 말라고 하신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8:3-5)”


하나님 앞에 올려진 우리들의 향(기도)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다. 하나님 앞에 있는 금단의 불을 가져다가 쏟으니 땅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는 이야기다. 기도의 응답이 그때쯤 되어지는 이야기로 보인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 6:9-10)”


성경이 이야기 하는 가장 큰 기도의 응답, 보류된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공의가 온 천하 만민 앞에 햇빛같이 드러나는 마지막 심판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개인적으로도 기도의 응답이 가장 잘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아마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응당 받아야 할 축복과 칭찬과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지금 이 요한계시록 6장 9-10절까지 나타난 말씀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이제 온 천하 만민을 심판하사 죄지은 자들을 불못에 던지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늘나라에 올려 의와 거룩과 영광과 존귀로 영접하실 그날까지 이 기도는 사실상 응답되지 않는 기도이다. 그것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제가 이만큼 살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런 기도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먹는 것으로, 입는 것으로, 자존심에 관한 것으로, 영광에 관한 문제로, 능력과 건강으로 이렇게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그때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이 문제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혹시 나를 외면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위하여 누가복음 18장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응답되어야 할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응답이 안된다면 거기에 또 다른 뜻이 있는 것이지 너를 싫어하거나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은 의외로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7-8)”


성경 전권을 다 뒤져서 가장 무서운 구절은 이 구절이다.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 구절을 외우면서 우리의 지금 삶의 모습이 내가 하나님의 참된 약속 속에서 건강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는 떡 받아 먹기 위하여 내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몽땅 응답되어진 기도의 제목만 있는 것이 꼭 신앙의 최고 경지는 아니다. 많은 기도들은 응답되어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인생과 온 천하 만민의 인생과, 온 우주의 경륜을 쥐고 계신 대장임을 마음으로부터 항복하는 기꺼운 신앙인의 자세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자세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다.


오늘 내게 필요한 기도의 제목을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주시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자신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내게 오늘도 가시가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시요, 그분의 뜻과 지혜의 깊은 것을 내가 다 알지 못하지만 그것으로 나는 항복입니다. 오늘 저는 아픕니다만 하나님이 대장이어서 저는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어느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이 보류될 것인지 잘 몰라도 내 모든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시며 마침내는 넘치도록 응답하실 아버지이기에 기도하렵니다” 이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쯤 하나님을 대접해 드려야 한다. 이것이 기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 회의적이다.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 말씀을 마음 속에 기억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정말 신앙생활답게, 기도를 기도답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승리된 생활을 영위하여야 한다.

누가복음 18장 7절 말씀을 다시 마음 속에 새겨 보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물며’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꼭 쳐놓으라. 누가복음 18장 1-8절까지 말씀은 ‘하물며’이다. 그 단어가 거기 등장하게 된 앞에서의 가장 부정적인 상황과 뒷부분의 가장 적극적인 상황의 그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단 하나의 지렛대인 ‘하물며’를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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