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글수 글 수 148
칼럼
신을 "보다" 변상규 교수
글쓴 날짜 시간 2023-09-19 20:56:06



구약 성서에서 가장 난해한 성서가 욥기이다.


욥기는 지금도 논란이 되는 책이며, 그 내용을 문학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최고의 문학 중 하나로 꼽힌다.
욥기의 주제는 성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듯 의로운 사람 욥이 무고한 고통을 받아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에게 절친이었던 세 친구들로부터 공격을 받다가 하나님을 만나 회개한다는 내용이다.

위의 그림을 보면 세 친구들이 욥을 향해 정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 친구들은 실존인물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
세 친구들은 도덕과 율법, 그리고 인과율을 상징한다. 그들은 욥을 향해 힐난한다.
"까닭없이 당하는 고난이 어디 있겠는가? 너는 분명 하나님께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결과로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세 친구들은 하나같이 욥을 공격하는데 그 공격의 근거는 신명기적 사고 방식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

또한 설사 욥이 죄가 없다고 해도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부정적인 태도와 언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는 것. 그리고 아무리 욥이 옳다고 해도 인과응보의 법칙, 혹은 인과율에 근거해 욥이 뭔가 하나님 보시기에 못 마땅한 행위를 하였으므로 욥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논리다.

고난을 당한 사람들 마음은 정말이지 고난을 당한 사람만 안다.
얼마 전 한 교수님이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저는 고아입니다. 그런 문자를 보냈다.
난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시기에..그 분의 문자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 분이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뼈저리게 와 닿을 것 같다..
고난을 당해보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자. 어줍쟎은 위로가 더 상처가 되는 법이다. 욥이 그랬다.
친구라고 하는 놈들이 찾아와 처음에는 위로해주는 듯 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의혹의 눈길로 욥을 바라보며 그와 논쟁하려 든다.


지금 욥은 몸도 정상이 아닌데..그 친구들은 셋이 힘을 합하여 마치 욥을 억지로라도 깨닫게 하려는 듯 자기들 스스로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욥을 거세게 몰아붙인다.
"넌 분명히 죄 지은 게 있을거야! 말해봐!"
"................"
욥이 느꼈을 박탈감과 좌절감, 분노와 절망, 억울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구약에는 욥이 있고 신약에도 욥이 있다. "예수"다. 그 분도 욥처럼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셨다.
그래서 칼 융은 죽기 얼마 전 "욥에의 회답"이라는 논문을 쓰는데..그 글에서 그는 신은 신이시기에 너무 전능하셔서 인간의 무능과 유한함을 모르셔도 너무 모르셨다고 하였고 드디에 욥의 강력한 항변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 스스로가 고통받는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자신의 전능함을 버렸는데 그게 바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 역설했다.


융은 신앙이 없었다 했지만 난 그의 욥에의 회답을 읽고 그가 신앙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욥은 항의하고, 항변한다. 소리친다. 피를 토하듯 억울함을 호소한다..내가 왜? 내가..왜?...


모든 고난 당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묻는다. "내가 왜..?.." 그런데 이상하다.
그런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들었다가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회개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갑자기 그가 왜 이렇게 태도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을까 말이다..


여기서의 힌트는 욥의 고백에 있다.
하나님을 귀로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라는 고백 말이다.
즉 귀로 듣는 신앙과 눈으로 보는 신앙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건 차원의 문제다.
2차원은 3차원을 이해못한다. 2차원이니까 마찬가지로 3차원 역시 4차원을 이해못한다. 3차원이니까.


자기애적인 성격의 사람은 자기가 왜 자기애적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자기애적이니까.
투사하는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투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투사하는 것이 늘 삶의 패턴이었으니까.. 욥은 착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마치 사람과의 관계인 것 처럼 착각한 것이다. Give & Take 하듯
내가 제사드리고 예배드리고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고 평안을 주신다는 논리다.


이게 바로 신명기의 논리다. 신명기가 이상한 건 아니다.
평생을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왔던 노예무리인 히브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란 유일신을 알려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유효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다녀보라.


긴 말 복잡한 말을 하면 못 알아 듣는다. 아주 간단하게 지시해야 한다. 그래야 사고가 없다.
마찬가지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간단하고 분명한 야웨 신앙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게 신명기다. 그러나, 신명기만 갖고 신앙이 가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잘 믿어도 병이 오고, 가난하고, 환란이 오고, 아이가 아프고, 문제가 터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 믿어서 꼭 복이 오는 것도 아니고, 안 믿어서 화가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신앙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신명기와는 너무 다른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게 욥기다.


욥을 기록한 사람은 내가 보기에 천재임에 틀림없다. 종교적 천재 말이다.
욥의 기록자는 너무나 무능한 욥과 대조시켜 너무나 전능한 하나님을 대조시킨다.
욥의 기록자는 너무나 도덕적인 욥과 인간이 만든 도덕이 필요없는 신을 대조시킨다.
욥의 기록자는 너무나 신앙적인 욥과 욥의 신앙을 벗어나는 하나님을 대조시킨다..
그래서 욥기 말미에는 하나님이 등장해 우주 삼라 만상에 관하여 욥과 논쟁하신다.


그런데 그 상황을 바라보면서 욥은 하나 크게 깨우치게 된 것이다.
"나의 신앙이 지나치게 도덕적이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너무나 인생처럼 여기며 대했구나.."
"나는 예배를 드리고(Give)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복을 주셔야(Take)한다는 것은 나의 일방적 착각이었구나.."


그래서..욥기 말미에는 욥은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그의 자식 잃은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닌데..
그는 모든 걸 덮고 하나님에게 회개하는 욥이 된다. 그는 신의 다른 모습, 다른 차원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영원하고 대단하며 전능하며 전률할 수 밖에 없는 신을 잠시 뵈옵고..욥은 달라진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유한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평생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 사람들이 말해낸 하나님,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완전한 해방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그 해방의 고백이 회개였다.. 어부 베드로에게 목수 예수가 묻는다.
"고기를 좀 잡았느냐"
"잡지 못하였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내려보거라"
어부가 목수의 말을 듣고 그물을 내리자 엄청난 고기가 잡힌다. 그 순간 어부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한다.
"제가..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십시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가 지은 죄는 오직 순종한 죄 밖에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죄인이라 할까


그는 죄라는 행위를 말함이 아니었다. 자기 존재가 유한하다는 고백을 죄인이라 고백한 것이다.
무한한 신의 현현을 체험한 베드로는 그런 고백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죄인"이라 고백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죄만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임을 고백하기에 죄인인 것이다.
유한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도덕이 중요하고 인과율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도덕도 인과율도 중요하지 않다.
그런 낯선 타자, 낯선 신을 욥은 "보게" 된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너무나 확실한 것을 경험하면 이를 "본다"고 말한다.
욥이 신의 형체를 봤다는 말이 아니다. 신을 확실히 체험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신을 이해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신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가?
그래서 고난은 항상 낯선 신을 계시해준다.
그리고 그 고난 앞에 신에 대한 믿음을 잃든지, 신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지든지 둘 중 하나다.
신은 그렇게 인간을 시험한다.
..
9년 전 글을 조금 다듬어 올립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2895 성화도 구원이다 [0] 김성원 교수 23/11/13 21
2880 우리는 계모가 아닌가? [0] 이종전 목사 23/09/21 254
2879 깨달음이 없는 신앙 [0] 이종전 목사 23/09/21 251
2878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0] 이종전 목사 23/09/21 257
2849 신을 "보다" [0] 변상규 교수 23/09/19 251
2847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0] 이종전 목사 23/09/19 135
2846 본질이 답이다 [0] 이종전 목사 23/09/19 5
2845 공교회를 회복해야 한다 [0] 이종전 목사 23/09/19 18
2844 기독교인의 심각한 우울증 [0] 이민규 23/09/19 62
2843 칼빈의 핵심 교리 / 정준모 박사 [0] 운영감자 23/09/19 0
2828 부모와 하나님의 생명창조 [0] 권혁승 23/09/14 69
2822 성령내재와 성령충만의 차이 [0] 박형룡 23/09/14 75
2817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드러냅니다 [0] 운영감자 23/09/13 308
2816 하나님은 실제적 존재인가? [0] 운영감자 23/09/13 322
2815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0] 운영감자 23/09/13 319
2812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0] 운영감자 23/09/13 317
2807 성경적 내적 치유 [0] 무화과 23/09/06 348
2806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0] 교회로 23/09/06 443
2723 하나님을 향한 마음 [0] 메리필드 23/02/24 336
2708 도덕 설교에서 은혜 설교로 [0] 변상규 23/02/21 318
2629 [지식] 정당한 저주와 부당한 저주 [0] G각생 23/02/16 335
2626 [사설] 참된 기독교 신앙을 원한다면 [0] 변상규 23/02/16 332
2624 [신앙] 동방 박사들은 구유에 누인 갓난아이 예수를 보았는가? [0] G각생 23/02/16 303
2623 [신앙] 종말론의 선 이해 [0] 흥피아 23/02/16 14
2574 [사설] 지진과 이신론 [0] 변상규 23/02/14 6
2568 [이야기] 나의 고통보다 우선되는 하나님의 언약 [0] G각생 23/02/14 3
2565 [이야기] 그냥 한 말 한 마디가.. [0] 변상규 23/02/14 7
2564 [바이블] 죄를 강조하며 후벼파지 않기 [0] 변상규 23/02/14 5
2517 [지식] 칼빈주의 강연 02 [0] 믿음의모험 23/02/08 8
2516 [지식] 칼빈주의 강연 01 [0] 믿음의모험 23/02/08 4